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문단 편집) === 종신 최고지도자 === [[1979년]] [[이란 혁명]]이 일어나 [[팔라비 왕조]]가 물러나자 이란으로 돌아와 임시 이슬람 혁명정부를 조직하여 메흐디 바자르간(مهدی بازرگان, [[1907년]] [[9월 1일]] ~ [[1995년]] [[1월 20일]])을 수상에 임명했다. 이후 샤푸르 바흐티아르(شاپور بختیار, [[1914년]] [[6월 26일]] ~ [[1991년]] [[8월 6일]])[* 당시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중동 지식인들의 정석 그대로 레바논의 프랑스 학교에서 배우고 유럽행 유학을 나가 경력 태반을 프랑스 사회당, 공산당 등 유럽 국제 좌파와 함께하며 심지어 [[스페인 내전]] 당시 국제여단에 지원하여 싸운 적도 있을만큼 대외적, 특히 불어권을 필두로 한 서방에선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이 사람도 팔라비 왕정 시절 내내 반체제 민주화 인사로 정권과 싸웠는데 팔라비 왕조가 물러나면서 그나마 세속주의적, 자유주의적, 근대주의적 성향이란 점에서 말이 통하는 바흐티아르에게 덤터기 씌우듯이 임시정부의 수장직을 맡겼다. 하술한 이슬람 혁명 과정에서 호메이니에게 정치적으로 제압당한 바흐티아르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반체제 이란인 망명단체를 주도하다 1991년 호메이니가 죽고 그 뒤를 이은 하메네이가 보낸 자객들에게 자택에서 암살당했다.] 수상이 이끄는 정부군과 게릴라 전투를 벌이며 이란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결국 정부군은 호메이니에게 협력하게 되면서 호메이니 측이 승리하였다. 호메이니는 만 16세 이상의 모든 이란 국민들에게 이슬람 공화정 체제 찬반투표를 실시했는데 98% 이상이 찬성했다. 이에 1979년 12월 신헌법을 공포하여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했다. 새로운 헌법에서 매 4년마다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했는데, 자신의 비서였던 최측근 [[아볼하산 바니사드르|세예드 아볼하산 바니사드르]](سید ابوالحسن بنیصدر, [[1933년]] [[3월 22일]] ~ [[2021년]])를 대통령으로 삼고, 스스로는 종신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좀 더 젊었다면 장기독재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 이미 70대의 노령으로 의외로 독재기간은 10년에 그쳤다.] 하지만 이슬람 공화국을 세우는 과정에 이란 혁명에 참가했던 다른 정파들이 반발했고 이슬람 정권은 이들을 박해했다. 우선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당시 이란에는 자생적 좌파 정당인 투데당(حزب تودۀ ایران / Hezb-e Tūde-ye Īrān), 좌파 무장단체인 파다이아네 할그(فدائیان خلق / Fadāʾiān-e Khalq), 모자헤디네 할그(مجاهدين خلق / Mojāhedīn-e Khalq)가 있었다. 파다이아네 할그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했고 모자헤디네 할그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지향했는데 이슬람 정부 수립 후에는 해외에서 반정부 활동을 이어갔다.] 세속주의자들은 종교인들이 정치를 해선 안 된다는 이유로 공화국엔 찬성을 했지만 이슬람 공화국에는 고개를 저었다. 종교지도자의 정치 개입에 대해 비판하며 이슬람과 서구 민주주의를 절충하자고 주장한 당대의 대아야톨라 세예드 모하마드카젬 샤리아트마다리(سید محمدکاظم شریعتمداری, [[1906년]] [[1월 5일]] ~ [[1986년]] [[4월 3일]])는 호메이니에 의해 1979년 11월 가택연금에 처해지기도 했다.[* 샤리아트마다리는 호메이니를 살려준 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숙청]]되었다.] 1979년 3월 30일부터 31일까지 실시된 국립투표에서 나온 이슬람 공화국 수립에 대한 거의 100%에 육박하는 찬성률은 당연하지만 부정선거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호메이니의 추종자들이 왕정의 협력자들뿐만 아니라 [[세속주의]]자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 중 신정체제를 반대하는 세속주의 정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암살되거나 암살 위협에 시달리다가 망명해야 했다. 좌파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문화혁명을 주도하여 1980년부터 2년 동안 이란 내 모든 대학교가 폐교되어 이슬람주의자들의 입맛에 맞게 과목이 바뀐 후에야 다시 개교했다. 급속도로 근본주의로 흘러가는 분위기에 반대하여 진보주의자들이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으나[* 예를 들어 혁명 한달여만에 정부에서 여성의 [[히잡]] 착용 의무화 드립을 치자, 그동안 히잡을 벗고 다니던 상당수 이란 여성들이 '우린 히잡 쓰려고 혁명을 지지한게 아니다'라며 길거리 시위대로 쏟아져나왔다.] 호메이니의 추종자들은 시위대를 '창녀', '제국주의 추종자'라고 하면서 시위대를 몰아세웠다. 신정 체제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은 가택연금했다. 호메이니는 바니사드르 대통령이 지나친 반미 정책에 회의감을 표하자 그를 이란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여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만들고 스스로 사퇴하도록 종용했다. 결국 바니사드르는 호메이니의 뜻에 따라 [[1981년]] 스스로 대통령직을 내려 놓은 뒤 해외로 탈출했다.[* 바니사드르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지지해서 호메이니와 상성이 맞지 않았고, 모자헤디네 할그와 연계를 시도했지만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밀려났다. 망명 후 바니사드르는 지지자들을 모아 이란국민저항위원회를 만들었다. [[북한]]의 [[자유조선]] 비슷한 단체로 보면 된다.] 이러한 강경 조치가 이어지자 반근본주의 움직임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이때부터 미국과의 계속되는 갈등이 벌어진다.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영화 [[아르고(영화)|아르고]]의 배경]으로 [[지미 카터]] 행정부에 큰 타격을 입혀 재선을 실패시키지를 않나,[* 세속주의와 비세속주의의 경계를 넘어서 많은 이란인들이 카터를 안좋아했다. 이는 카터 행정부가 겉으로는 인권 외교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팔라비 왕조의 반대파 등 인권 탄압 정책들을 묵인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뒤에는 [[사담 후세인]]의 침공을 받아 [[이란-이라크 전쟁]]에 걸리질 않나... 하지만 [[이란 콘트라 사건]] 같은 흑역사를 보면 또 실용적으로 살 무기는 산 모양이다. 외교 능력은 막장으로 [[미국]], [[소련]], [[유럽]], [[중국]], [[터키]], [[이스라엘]], [[이집트]]를 죄다 적으로 돌리는 위업을 달성했다. 팔라비 왕조를 미국의 개로 비하했으니 미국과는 당연히 사이가 나빴고, 이란은 이때부터 미국에 경제제재를 받기 시작해 2016년에 핵 협상으로 해제될 때까지 고생한다.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도 사이가 나빴는데 호메이니가 반정부적 인사들을 목매달 때 쓰던 레퍼토리 중 하나가 '저놈은 좌파다, 소련 첩자다.'였다.[* 빨갱이 만들기는 당시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독재자들의 인권 탄압 명분이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화 [[페르세폴리스(만화)|페르세폴리스]]에서 혁명 직후 이란의 정세를 다뤘는데, 팔라비 왕조에 저항하다가 고초를 겪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공격받는 모습이 나온다.] 유럽 역시 서방권인데다가 이단으로 매도하며 유럽이 빌려준 돈 다 떼어먹으니[* 당시에 석유값이 사상최고점(30달러대)을 찍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자율이 20%대에 육박했던 시절이라고 하지만 다른 후진국도 아니고 세계적인 산유국인 이란이 돈을 떼먹으니 서구권 국가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다.] 역시 사이가 틀어졌고 혁명 수출론이다 뭐다 해서 중국 이슬람 교도들 중에서 [[위구르족]]들에게 혁명을 일으키길 자극하니 중국과도 사이가 틀어졌으며 친서방 국가에다가 세속적인 것도 모자라 종파까지 다른 [[터키]], [[이집트]]와도 당연히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대놓고 호메이니를 '''미치광이(Lunatic)'''이라고 불렀으며 [[이란-이라크 전쟁]] 때에도 이라크에 헬기와 총기를 팔아넘겼다.] 게다가 아랍권 국가들과는 종파가 다르다보니 아예 역사적으로 철천지 원수였다. [[팔라비 왕조]]의 우방국인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는 지원을 받아놓고 나중에는 입을 싹 씻고는 시아파가 아니란 이유로 일방적으로 우호관계를 파기했고[* 물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군과 전쟁을 벌이던 무자헤딘 세력들을 지지해주긴 했다.] 시아파 율법주의로 그나마 좀 개방적이 되어가던 아랍권에서 수니파 율법주의와 [[와하비즘]]이 대두되는 연쇄 효과를 낳았다.[* 그럼 이라크 시아파들과 사이가 좋았느냐? 그러긴 커녕 되려 '''미국보다도 사이가 나쁘며''' 호메이니가 이라크의 남동부 절반 시아파 지역을 내놓으라고 하자 '''적대적이었던 이라크 시아파들이 후세인 곁에 붙어버렸다.''' 이쪽은 [[아랍인|아랍권]]과 [[이란인|이란]]의 민족 구성이 다르다는 문제가 있어서 실제로도 이라크와 이란은 같은 시아파 이슬람 국가들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도 바빌론과 페르시아 문명 때부터 오랜 기간 싸워오는 등 사이가 안 좋은 앙숙관계이다.][* 종교적으로 비슷한 이슬람권 국가들도 이웃나라끼리 역사적 / 정치적으로 사이가 앙숙인 경우들이 허다하다.] 이러한 외교의 결과로 [[이란-이라크 전쟁]] 때 미국과 소련, 중국, 사우디 등 전 세계가 손을 잡고 이라크에 무기와 자금 대주면서 이라크의 대량 살상 병기 사용까지 눈 감아 줬고, 이란은 이라크 대비 우세한 국력에도 이라크를 압도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